가까운 뷔소트니키의 일원이 툭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 그녀가 아, 하고 문득 정신을 차리면 그는 정신 놓고 있었어. 라며 가볍게 웃고는 제 할 일을 하러 간다. 러시아 사람들은 웃음에 박하다던데, 웃음을 보이는 것을 보면 자신을 확실히 동지로 인식한 걸까, 라는 생각이 든다. 어색한 미소로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정신을 놓은 게 아니에요. 정신을 집중해버린 거죠. 그녀의 머릿속에 든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깜빡, 눈이 마주친다. 아무도 모르게 저 먼 하늘을 담은 색의 눈동자는 부드럽게 휜다.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면 발랄라이카는 키득키득 웃는다. 침묵이 먼지처럼 가라앉은 집무실에서 그 웃음소리는 떠다니는 빛무리의 터짐과도 같아서 반짝반짝 그녀의 귓가에 녹아든다. 귓가가 붉다.
"놀리는 건가요."
샐쭉거리는 입매에 속절없이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아니, 귀여워서."
"그게 놀리는 거잖아요…."
고개를 푹 숙여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장막에 얼굴을 숨긴다. 그 안은 분명 석류의 색보다도 짙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서류에 사인을 긋는다. 만년필 촉이 경쾌하게 종이 위를 거니는 소리가 울린다.
"아냐, 정말로. 불가지빌리 동지에게서의 연락은?"
"정말…, 아, 여기요."
붉은 밀랍으로 날인이 찍힌 편지를 내민다. 날카로운 지칼이 가볍게 봉투를 가른다. 붉은 밀랍으로 된 날인이라니, 고풍스럽기도 하지. 시시한 생각의 흐름을 타고 오른다. 발랄라이카의 눈은 날카롭게 쓰여진 문장을 따라간다. 사람의 눈이 어떻게 저렇게도 투명하고 차갑게 푸르를 수 있을까. 흡사 푸른 다이아몬드를 그대로 박아놓은 것만 같다.
"네 시선은 무겁네."
푸른 시선이 편지에서 그녀에게로 흘러 올라온다. 흠칫,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저번에도 쳐다보고 있었지."
"제가 언제,"
"요 전번에 클럽에 정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갔을 때."
그녀는 입을 다문다. 어두운 클럽 안에서 색색으로 비치는 불빛에 변화하는 머리카락이라던가 눈동자의 색이 아름답다고 생각해버린 탓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눈을 깜빡이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라군에 배달 물품을 직접 받으러 갔을 때도."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창밖은 아직도 밝다. 그때에도 이런 밝은 햇살 아래에서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코트 자락과 금빛 머리칼에 시선을 빼앗겼다.
"AV 영상 체크 중에도 설마 나만 쳐다보고 있을 줄은 몰랐지."
그녀의 등에 식은땀에 조금씩 배어 나온다. 그건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는 말이 목 끝까지 기어오른다. 영상체크 중이라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AV 체크 내내 정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내내 지루한 표정만을 지었지만 피곤함이 역력한 표정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푸른 눈동자가 오른쪽 위로 올라간다.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 그렇게나 많이도 쳐다보고 있던 걸까. 그녀의 손가락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꼬물거린다. 발랄라이카는 그것조차도 지켜보고 있다. 편지로 가린 얼굴로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그만할까?"
"네. 부디."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붉게 떨린다. 발랄라이카가 편지를 내려놓는다.
"이르지만 식사하러 갈까."
발랄라이카의 말에 그녀는 허둥지둥 자리로 돌아가 좌식책상 위 널브러진 종이들을 정리한다.
"네가 식사 중에도 쳐다보고 있지 않는다고 해주면."
깜짝 놀라 종이에 손가락을 베인다.
"…그만 놀려주세요……."
"어머, 그래?"
낮은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거부의 의사를 흘려버린다. 발소리도 없이 다가와 베여버린 손가락을 부드럽게 잡아 살짝 입을 맞댄다. 금빛의 속눈썹이 길다.
"봐, 지금도 쳐다봤지."
말과 함께 발랄라이카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목까지 새빨갛게 물든다. 어쩌면 목 아래, 옷으로 가려진 몸까지도 잘 익은 문어처럼 변해버렸을지도 모른다.
"후후, 농담이야. 가자."
뻣뻣해진 몸을 이끌고 그녀는 발랄라이카를 뒤따른다.
-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녀는 한숨을 내쉰다. 레비는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럭키 스트라이크의 연기가 바보같이 공기중에 흐른다. 그런 이야기 별로 듣고싶지 않았어. 수축한 동공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리낌이 없다. 이래뵈어도 불성실한 표정이지만 듣는것 만큼은 성실하게 들어준다. 어쩐지 그렇다. 호텔 모스크바에서 라군에 찾아와 그녀의 이야기 정도는 성심성의껏 들어달라며 부탁을 해온것을 그녀는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탁자를 뒤엎어버리고 싶은것을 참으며 레비는 한숨을 내쉰다.
"너 말이야…그 감 좋은 누님한테 네 숨기지도 못하는 기척 하나하나가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냐?"
"시선 정도는…."
"넌 시선도 티나. 완전 티나. 시끄러워."
레비의 말에 그녀는 눈에 불신의 빛을 떠올린다.
"시선이 시끄럽다니 무슨,"
"그렇잖아. 주변에 아기 고양이가 숄랑 숄랑 왔다 갔다 하면서 놀아줘, 쳐다봐줘, 쓰다듬어줘, 좋아해 줘, 사랑해 줘 말하는데 못 알아채고 배기겠냐고."
"잠깐잠깐잠깐, 그런, 그런 시선은 안 보냈어요!"
"보내던데. 아주 열렬하게."
잠깐 언성이 높아진 그녀는 레비의 말에 입을 꾹 다문다. 언제 봤다고, 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전번에 라군에 물품을 받으러 왔던 때를 떠올리고는 다시 입을 다문다. 그녀의 표정에 조금은 만족스러워졌는지 레비는 입가를 올리고는 음, 음 고개를 끄덕인다. 누님과 너의 알콩달콩한 썸타는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지만 말이야, 네 그 표정 하나는 좋네. 레비가 입으로 하지도 않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천만 가지로 변화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레비는 그녀를 놀려먹는 그녀의 주변 사람들을 이해할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흠, 뭐, 알았으면 이제 가서 직접 말로 사랑해달라고 하라고, 아기 고양이 씨. 밤이 늦었다구? 이 몸은 또 한밤의 바다 위에서 다른 배를 낚아와야 할 임무를 맡고 있단 말이야."
"그런 거 할 리가 없잖…, 일에 대한 일은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비밀주의를 지키냐. 아, 근데 또 모르지. 네가 누군가한테 말했다가는 머리에 시원하게 구멍이 뚫릴지."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씨익 웃는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나도 네가 사랑하는 누님한테 그렇게 당하겠지만 말이야. 뒷말은 꿀꺽 삼킨다. 어차피 그녀는 발랄라이카가 그녀를 위해 여기저기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것이다. 몰래 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네 모든 움직임이 누님에게 보고되고 있단다. 말해주고 싶은 것을 잠깐 떠올렸다가 머리에서 지워버린다. 말했다가는 구멍 뚫린 원숭이 머리 2탄이다.
"협박하는 건가요."
"아냐, 아냐. 농담. 어차피 너 여기 친구 없고."
일말의 공포와 불쾌함이 뒤섞인 그녀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내보낸다. 이런, 풀릴 줄을 모르네. 레비는 숨을 집어삼킨다.
"밤이 늦었다니까. 봐, 누님이 데리러 왔다."
이야기를 돌리려 창문 블라인드를 젖힌 순간 벤츠의 엔진음과 함께 차체가 라군상회의 앞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창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모습에는 주인을 반기는 애완동물의 귀랑 꼬리라도 보이는 듯하다. 어떻게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알았냐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반기는 그 모습에 기가 찬다. 그런데도 안들키길 바랬냐. 턱을 괸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다.
-
"그래서, 레비 씨가…, 아."
졸음에 풀리기 시작한 목소리에 발랄라이카가 그녀의 눈을 손으로 가린다. 살짝이 느껴지는 체온이 따스하다. 눈 위의 따스함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편안함을 가지고 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는지 손바닥에 옅은 속눈썹이 느껴진다.
"어린애 아닌데…."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니 감고 있도록 해. 종일 서류업무를 도왔으니까."
눈이 피로하겠지, 라는 핑계로 손을 떼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새까만 어둠이 몰려온다. 어둠은 시야만이 아닌 몸 전체를 꾸물꾸물 타고 오르는 것 같다. 이불과도 같이 편안한 어둠이다. 몸을 다 타고 오르면 의식을 덮기 시작한다. 정신이 깜빡인다.
"잠들었을까?"
조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편안함에 몸을 맡겨 네, 든 아니오, 든 답을 할 힘조차 없다. 아니 어쩌면 무의식만이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기분 좋은, 가벼운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섞인다. 잠든 그녀의 얼굴에서 발랄라이카는 조심히 손을 뗀다.
"바라보기만 하면 가질 수 없어."
작게 속삭이고는 바라보지 못하는 눈꺼풀 위에 가볍게 키스한다. 언젠가 직접 말로 하렴. 그때는 말해준 입에 키스해줄 테니.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를 흘려보내곤 발랄라이카도 가볍게 눈을 감는다. 차가 도로를 달리는 소리가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