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녹아들지 못한 사람은 보는 사람의 마음조차도 흔들어두어서 불안함의 파문만이 가득 메워나간다.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한 사람을 붙잡아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떠나지 못하도록 계속 붙잡고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어디에도 흘러가지 못하도록. 하늘로도 땅으로도 사라지지 못하도록. 그렇기에 붙잡았다. 상대의 의견은 염두에 두지 않은 자신만의 억지였을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자신만 이 공간에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해본 적 없나요?"
집무실, 그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무엇인가 흔들린 기분이 들었다.
"여기 이야기?"
"아뇨, 그냥."
두리뭉실 넘어가는 대답에 이야기가 맞물리지 않는다. 어쩌면 그냥 해 본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디에 있든지 현실이 발목을 옭아매 와서 없었던 것 같네."
서류철을 넘긴다. 프린트 되지 않은 자필 구식 서류는 까다롭다. 누군가 또 Т를 Г와 헷갈리게 써뒀다. 휘갈겨 쓴 키릴문자의 필기체 위로 자꾸만 시선이 미끄러져 결국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소련에서도, 아프간에서도, 로아나프라에서도, 현실은 무겁기만 한 것이었다.
"지금도."
지금도 그래. 말의 끝까지 잇지 않아도 그녀는 알아듣는다. 만년필의 잉크가 조금 새어 나왔다.
"나눠줄까?"
이 무게.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래, 나눠줄 수도 없지만 말이야. 살짝 숨을 들이마신다. 어쩌면 이곳이 그녀의 현실이 아니라서, 그녀를 지탱해줄 수 있는 것도, 그녀를 무겁게 짓누를 것도 없어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녀의 세상에서도 그랬을까? 톡톡, 책상을 두드린다. 짙은 색의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에 소리가 녹아들듯 스며든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향한다. 가볍게 어깨를 내리누른다.
"괜찮아요, 지금은 떠 있지 않으니까."
속까지 비쳐 보일 듯 비쳐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말끄러미 올려다본다. 지금은? 그러면 언제는 떠 있었어? 묻고 싶은 것에서 입을 다문다. 여기에서는 떠 있지 않은 다른, 많은 사람이 없으니까 본인이 떠 있지 않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고? 한 번 더, 입을 다문다.
"사랑에 빠지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어?"
대신에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네?"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유리구슬처럼 맑게 빛난다.
"그건 말이지,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야."
대답도 없이 올려다만 본다. 아직 들어본 적이 없을까. 내가 들려준 적이 없었던 걸까. 몇 번이고 들려주었는데도 그녀가 귀를 막고 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이 무너지면 어차피 다들 떠 있기 마련이지."
"떨어지는 게 아니라요?"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은 떠 있다고들 하잖아? 발밑이 사라져도 모르는 거야. 사랑은 사람의 세상을 뒤집어 놓는 것인데."
그런 거 들어본 적 없다. 그저 허구의 이야기. 하지만 어차피 현실이 아니라면 현실의 것이 아닌 이야기도 괜찮지 않아?
"이해될 것 같네요."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그 존재감만큼이나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희멀건 하다. 그래? 다행이네. 궤변만 늘어놓는 이야기인데. 아이스블루의, 푸른 눈동자가 같이 가늘어진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지는 소리를 들으면 조금은 안심되지 않겠어? 무너진 세상이니 떠 있는 거라고."
"그런가요?"
희끄무레하게 웃음기가 더해진다. 그녀의 옆에 앉는다. 그녀 용으로 가져다 둔 쿠션조차도 이 방에서 붕 뜬 바이올렛 색.
"들어본 적, 없어?"
사랑에 빠지는 소리를. 눈을 한번 깜빡이고 시선을 맞춘다. 그녀도 눈을 깜빡인다. 그 속까지 다 들여 보일 것만 같은 투명한 눈동자는, 사실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고양이처럼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눈웃음친다.
"있는 것 같네요."
"다행이네."
없다고 답했다면 지금 당장 들려주려 했어. 눈으로 말한 것을 읽었는지 그녀가 쿡쿡 웃는다. 사랑은 말이지 세상이 무너지는 거야. 마음속에서 그 말이 소용돌이친다. 이미 재정립시켜버린 세상의 입구를 허물어버린 사람도 있으니.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그게 사랑이란 것은 본인조차도 나중에 알았지만.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그녀가 나의 금발에 손가락을 걸어 쓸어내린다. 전혀 다른 색인데도 반짝이는구나, 네 머리. 똑같이 그녀의 새까만 머리를 쓸어내린다. 가볍게 끝에 입을 맞춘다.
"몇 번이고 들려줄게."
무엇을? 이라고 되묻는듯한 눈동자에 바보구나, 라고 답하는 듯 미소를 짓는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
"그럴 때는 사랑에 빠지는 소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녀가 키득키득 웃는다.
"뭐 어때."
가볍게 볼을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고 호흡이 멈춘다. 어쩌면 이 방의 공기조차도 멈췄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들려줄까?"
살짝 밀어붙이면 어느새 시선은 돌려진다. 그렇지만 역시 바이올렛 색과 검은색은 잘 어울리네. 흐트러진 머리칼을 보며 생각한다.
"이미 들은 것 같은데, 여기서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손이 내 머리끈을 잡아 푼다. 금발이 떨어져 내려와 바이올렛 색과 검은색 위로 떨어져 내린다. 흑발과 금발이 물결치듯 뒤섞인다. 같은 향이다.
"그래야 안심되니까."
"거짓말."
"응,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는 것이 거짓말이야. 내 세상을 무너뜨린 사람을 붙잡아두는 것 정도는 하고 싶으니까. 말을 삼키고, 한 번 더 입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