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가 뿌옇다. 물이 피부에 들러붙는다. 질척하게. 공기마저도 옅은 분홍색으로 물든것만 같다. 물에 풀어진 것 마냥 연기처럼 채 휘저어지지 못한 탁한 색의 공기가 숨결을 따라 폐부로 스며든다. 물은 상처로 스며든다. 예리한 고통이 몇 번이고 척수신경을 타고 뇌까지 쑤셔온다. 욕조 반대편에는 누군가 앉아있다. 익숙한 머리 색, 익숙한 얼굴, 그리고 익숙한…, 나다.
기분이 어때?
말을 걸어온다. 목소리까지 똑같은 걸까. 나는 두개골 속에서 울려 전달된 내 목소리밖에 듣지 못했으므로.
어디겠어? 그것도 제대로 생각 못 하는 지금의 너는 머저리야. 이런 꼴을 당할 뻔 했다고, 너는.
나를 바라보는 내 얼굴로 피가 흐른다. 마치 두개골에 9mm 납탄환이라도 박힌 모양새다. 22LR이라면 저렇게 멋들어지게 구멍이 뚫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있게 되면서, 그런 것들을 알게 되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응시하고 있으면 피는 흘러흘러 물에까지 흘러든다. 연분홍빛으로 섞인 물 위로 검붉은 피가 뒤섞인다. 썩 좋아 보이는 모양새는 아니네. 욕조에 피가 섞이니까 그만 사라져주겠어?
좋아. 뒷일은 나도 모르는 거야.
건너편의 나는 순식간에 공기 중에 녹아들어 사라진다. 욕조에 뒤섞인 피도 말끔히 사라지고 없다. 뒷일?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데? 욕조물에 녹아들던 피만큼이나 정신이 공기 중에 녹아든다. 누군가 팔을 끌어당긴다. 욕조 밖으로 매가리 없이 몸이 딸려나간다. 수건에 감싸여 안긴다. 발끝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차다. 눈이 감긴다. 공기는 제 색을 찾아가고 있다.
-
아, 여기는 도크다. 항구가 가깝다. 여기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다. 누구였을까? 라군상회의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지. 분위기가 비슷한 사람이었다. 라군의 와이셔츠 차림의 넥타이를 맨 해적이랑. 여기와는 안 어울리는 이질적인 분위기는 나랑 닮아있었다. 가까운 나라 출신의 사람. 지금은 아무래도 좋지만. 이 시간까지 누구를 기다렸을까? 밤이고, 비가 내릴 것만 같다. 공기가 축축하고 바닷가임에도 민물의 냄새가 난다.
"아가씨."
나지막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부른다. 저번의 목소리다. 어딘가에 데려다주겠다던. 어디로? 아냐, 그건 궁금하지 않다. 나는 분명하게 거절의 말을 하러왔다.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는 그 얼굴을 보면 매몰차게 바람맞힐 수가 없었다. 제때 대답했으면 몰래 나오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생각이 많아져 답을 미뤘다. 가까이 다가온 그 사람은 은근 풍채가 좋아서 잠시 주눅이 들었다. 이렇게 좋아 보이는 사람에게 왜?
"우리와 같이 가기로 한 것 맞지?"
아, 이거구나. 말하면서 웃는 얼굴의 눈에는 웃음기가 없다. 목소리만이, 입만이 상냥하다. 눈에는 무언가가 씐 것 만같이 예리하고 날카롭다. 잘 정비된 해적의 칼만큼이나. 고개를 젓는다. 입을 열려고 하자 팔이 붙잡혔다.
"위험하잖아, 거기는. 호텔 모스크바는."
눈이 위험하게 빛난다. 이건, 위험하다. 빼려고 한 팔을 더 강하게 붙잡아온다.
"괜찮아, 우리는 네가 필요한 것만 말해준다면 위험하게는…,"
"우리보다는 네가 더 위험하겠다만?"
강렬한 벤츠의 전조등이 이쪽을 비춘다. 수많은 군화의 발소리가 일사불란하게 주변으로 퍼진다. 눈이 부시고, 귀가 소란스럽다. 숨죽인 공기가 피부로 전해져온다.
"대위…,"
"한밤중에 이게 무슨 짓이지?"
아이스블루의 눈이 한층 더 짙푸르다. 위험하다. 이건, 다른 의미로 위험하다. 화나게 해버렸다.
"아가씨."
" ."
서로서로 나를 불러댄다.
"우리랑 갈, 거지?"
"이리 와."
목소리가 겹쳐진다. 기억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뒤섞인다.
"이쪽, 에,"
"두 번은 말하지 않아."
고개를 까딱인다. 어느 쪽도 눈이 웃고 있지 않다. 발을 내딛는다. 어느 쪽이냐면, 짙디짙은 푸른 쪽이다.
"이럴, 바, …강제로…, …밖에…!"
"전원 일시 준비, 사격!"
옆구리가 뜨겁다. 이건 확실히, 22LR이네. 223구경이나 9mm짜리였단 봐. 나라면 쇼크로 죽었을걸. 짙은 푸름이 몸을 감싸고 몸 안을 짜디짠 바닷물이 채워간다. 상처는 차갑게 식었다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른다. 소금기에 상처가 비명을 지른다. 말을 잘못했어. 22LR 탄환이라도 죽을 것 같네. 쇼크사로. 기억이 뒤섞인다.
-
"미안해요."
공기가 차갑게 뺨을 쓸어올린다. 감싸 안은 몸은 따뜻하다.
"거절하려는 말을 하러 나갔을 뿐,"
"알아."
말이 짧게 잘린다. 침묵이 복도를 걷는 것만 같다. 숨이 막힌다. 아직도 염분기에 입 안쪽이 쓰다. 대위님은 어디까지 알고 있다는 걸까. 내 마음까지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들이마신 공기마저도 쓰다. 혀에 오블라트라도 감싸고 싶을 지경이다. 방에 들어서서, 부드럽게 발끝까지 수건으로 닦아지고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혀놓아 진다. 새하얀 수건에 조금씩 피가 스며든다. 작게 신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다.
"물에 약을 풀어놨는데도 아픈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내 안색을 살핀다. 총알은 위력이 약한 탄인데도 그대로 관통한 걸까?
"괜찮아요."
"아니, 의사를 부르도록 하지."
그 의사, 자격증은 확실한 건가요? 농을 던지고 싶은 입을 다문다. 뒤 돌은 모습에 바다의 밤공기가 뒤섞인다.
"대위님."
아직 물기가 남은 발끝에 닿은 카펫이 부드럽다. 옆구리의 고통에 숨이 턱 막혀온다. 아슬하게 반쯤 돌은 몸을 움켜잡는다.
"두 번은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위는 올려다보지 않는다. 표정을 보기 무섭다. 막힌 숨을 어떻게든 뚫으려는 듯 크게 숨을 몰아쉰다.
"그래."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기 중에 떨어진다.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여기 봐."
안정된 호흡으로 고개를 흔든다.
"두 번 말하게 하지 않겠다며?"
손은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와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천천히 고개를 올리면 어느새 가볍게 입술이 맞닿는다. 위로부터 내려온 금색의 머리칼이 어깨를, 팔을 타고 흘러내린다. 혀가 부드럽게 입술을 쓸고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다. 급하게 입을 떼면 장난기 섞인 미소가 이쪽을 내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