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비…."
콧잔등에 떨어지는 빗방울에 무심코 말이 흘러나온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 채워나가고 있다.
"왜 거기 가만히 서 있어?"
지하에서 올라오는 계단에서 목소리가 먼저 타고 올라온다. 제 목소리보다 한발 늦게 올라온 발랄라이카는 앞선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본다. 뭉글뭉글 얽히고설켜 뭉쳐진 잿빛 구름이 제 몸을 쥐어 짜내며 비를 토해내고 있다. 태국의 여름은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오는 우기. 그것을 상기시키듯 갑작스러운 비는 게릴라성 호우처럼 엄청난 양의 빗물을 퍼붓는다.
"중사는…, 무리겠군."
핸드폰 화면에 띄워진 메시지를 보며 발랄라이카가 작게 중얼거린다. 순식간에 거세진 비는 낙하하는 소리만으로 귓가를 때린다. 어두워진 색채의 공기가 습기를 머금고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그 호우 속에서도 소름 끼치도록 맑은 눈동자가 발랄라이카를 향한다.
"뛸까요."
"뭐?"
그녀의 눈동자만큼이나 투명한 목소리에 발랄라이카는 의문문을 입에 올린다.
"모스크바는 그렇게까지 멀지 않고. 어차피 중사님이나 다른 동지들이 차로 마중 오지 않는다면 중간에 어디선가 우산을 빌릴 수 있어도 다 젖을만한 양인걸요. 서류처리는 내일까지니까 급하다고 하셨잖아요? 오늘 밤에는 회의도 있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이루어지는 납득 가능한 설명. 그러나 모스크바까지 멀지 않다고 해도 그 거리는 걸어서 20분은 족히 된다. 그에 더해…. 발랄라이카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그녀의 옷으로 시선을 내린다. 군청색의 리본이 매어진 하얀 블라우스. 짙은 색의 카디건을 걸치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이 비의 흡수를 다 막아주지는 못할 것이다. 눈을 잠시 감고 느리게 깜빡인다. 날카로워진 눈매로 건물 입구에서 한걸음 차이만으로 공기까지 젖어버린 밖을 흘긴다.
"어쩔 수 없네."
어깨에 걸친 코트를 가볍게 내려 팔에 쥔다. 그녀의 머리에 덮어씌운다.
"뛰자."
계단을 올라올 때와는 달리 한 발 먼저 발을 내딛는다.
"…! 잠깐, 대위님…!"
먼저 뛰쳐나간 발랄라이카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급히 덮어씌워 진 코트를 붙잡고 따라붙는다. 힐을 신었더라도 그 속도는 그녀가 따라잡기에는 벅차다. 떨어지는 비는 사정없이 몸에 부딪혀오고 시야를 희뿌옇게 적셔간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달린다. 다리를 움직이는 게 이렇게까지 무거울 일이었던가. 습기로 가득 찬 공기가 발목을 붙잡는 것만 같다.
"대…님, 또………게…!"
빗소리에 목소리가 흘러 닦여나간다.
"그……까…기다……라……고요!"
그녀의 다리보다도 빠른 목소리조차 발랄라이카를 따라잡지 못한다.
"감……리면…어………고…!"
앞선 발랄라이카가 순간 걸음을 멈춘다. 그제야 목소리가 닿았는지 빗속에서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쳐다본다. 목소리보다도 뒤늦게 따라잡은 그녀는 비가 입속에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크게 숨을 헐떡인다. 습기로 가득한 공기 중에서 산소를 받아들이기란 여간 쉬운일이 아니지만 그녀는 금방에 고개를 치켜든다. 여전히 빗소리는 세차게 귓가에서 머문다. 그 탓에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발랄라이카가 그녀가 고개를 들자 고개를 기울인다. 잠깐 사이에 다 젖어버린 발랄라이카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눈을 찌푸린다.
"대위님 바보!"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커다랗게 소리친 그녀에 발랄라이카는 어울리지 않는 얼빠진 표정을 짓는다. 동그랗게 떠진 짙어진 색의 푸른 동공이 그녀를 향한다.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제 머리에 걸쳐진 코트의 절반을 발랄라이카 위로 덮어씌운다.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요."
여전히도 투명한 눈동자에 발랄라이카의 모습이 비친다. 비가 코트 위로 떨어지는 자그마한 울음들이 느껴진다.
"제가 이미 다 젖어버려서…, 불편하더라도 참으세요."
그녀의 말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가볍게 코트의 가를 잡아 그녀가 비를 맞지 않게 안정적으로 하늘을 가린다.
"이미 다 젖은 건 나도 마찬가지인걸. 내 속도를 따라올 수는 있겠어?"
"대위님이 맞춰주셔야죠."
당연하다는듯한 그녀의 말에 한 번 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쿡쿡 웃음을 흘리고 만다. 한결같이 재미있는 아이. 처음보다 한 박자 늦게, 천천히, 그녀의 속도에 맞춰 다리를 움직인다. 눅눅하게만 느껴지던 비가 차갑게 피부를 식히며 이상하게도 상쾌하게 느껴지는 기분이 든다.
"중사님께 혼나지 않을까요?"
커다랗게 울리는 그녀가 소리친 말이 귓가에 닿아온다.
"어차피 중사도 다 젖어서 들어올걸?"
차에서 내려 건물로 오기까지의 잠깐 사이에 아주 푹 젖은 생쥐 꼴이 될 테니. 비에 씻겨나간 뒷말을 그녀가 알아들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키득키득 웃는 것을 보아 제대로 전해진 모양이다.
"그럼 물에 빠진 생쥐 님께서 따뜻한 차라도 준비해두셨기를 기대해야겠네요."
"폭신한 수건도 말이야."
가까워지는 호텔 모스크바의 건물에 발랄라이카와 그녀는 걸음을 천천히 늦추며 웃는다. 비 사이로 보이는 흐릿한 입구에서는 발랄라이카의 말처럼 푹 젖어버린 보리스가 뒤늦게서야 장우산을 들고 마중을 준비하는 것이 보인다. 그녀와 발랄라이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우산을 들고 뛰어온다.
"이미 다 늦었어, 중사."
발랄라이카의 말에 당황스러운 표정이 보리스의 얼굴에 떠오른다. 발랄라이카는 머리에 덮어씌웠던 코트를 그녀의 어깨에 걸치고는 앞섶을 굳게 여민다. 그 모습이 여간 즐거워 보이는 것이 아닌지라 보리스는 의문과 안도감이 섞인 표정을 띄운다. 말은 없으면서도 그렇게 다채로운 표정으로 의사 표현을 전한다. 그녀와 발랄라이카는 그런 보리스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트린다. 짧은 거리의 입구까지, 급하게 뛰어왔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여유롭게 걸으며 당도한다.
"젖어버린 상태에서 미안하지만, 중사. 누군가에게 우리가 씻을 동안 따뜻한 차를 준비해달라고 말해주겠어?"
"Да."
발랄라이카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짧고 간결한 답이 돌아온다. 아마도 그는 빠르게 제 몸을 정돈하고 본인이 차를 준비할 것이다. 보리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자 그녀는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는다. 입 모양만으로 부탁해요, 라며 말을 건넨다. 그 말에 답하듯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그 모습에 내적 웃음을 짓고는 제 키보다 아슬하게 긴 코트가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갖은 애를 쓰는 그녀를 이끌어 발랄라이카는 욕실로 향한다.
"같이 들어가시려고요?"
일말의 불안감이 섞인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웃는다.
"급해서 빗속에서도 달려왔는걸?"
웃음기가 섞인 발랄라이카의 목소리에 그녀는 입술을 비죽인다.
"다른 곳으로 따로 들어가면 될 텐데."
"어머, 그렇게도 나랑 같이 들어가는 게 싫어?"
"싫은 건 아닌데…,"
그녀의 흐려지는 말에 발랄라이카는 또다시 웃음을 흘린다.
"그럼 코트를 빌려준 대가라고 생각하렴."
발랄라이카의 말에 그녀가 입을 다문다. 끼익끼익 녹슨 소리가 나며 돌려지는 수도꼭지에서 빗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세찬 소리의 물이 흘러나온다. 흐르는 물에 가볍게 손을 대 온도를 맞춘다. 수건에 손을 닦고는 그녀가 걸친 젖어버린 코트의 여며진 앞섶을 열어 바닥에 떨어뜨린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코트는 그 무게가 늘었는지 둔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제가 할…,"
그녀의 말을 막듯 입을 맞춘다. 빗물을 잔뜩 마셔 몸에 가둔 카디건을 코트 위로 떨어뜨린다. 피부에 젖어 달라붙은 블라우스가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군청색의 리본을 천천히 당겨 푼다. 벌어진 블라우스의 칼라 깃 사이로 드러난 목에 키스한다.
"이러니까…, 급하다고 하셨잖아요."
발랄라이카의 어깨를 밀어내며 그녀가 부루퉁한 소리를 낸다. 이러니까 싫은 거라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는 게 그렇게 귀여울 수 없다.
"그렇지. 그렇지만 시간 내에 끝낼 수는 있는데?"
부끄러움을 숨기듯 그녀의 눈썹이 더 찌푸려진다.
"후후, 알았어. 대신 회의가 끝나면 부탁해?"
부탁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지 않나요. 놀아달라는 것과 같잖아요. 그녀는 따뜻한 습기를 머금은 욕실 공기와 함께 말을 삼킨다. 건물의 안에 위치한 욕실까지도 세찬 빗소리가 섞여 들어온다. 그녀는 여전히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기는 발랄라이카의 정장 단추를 풀며 잔뜩 머금었던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섞인 한숨을 내쉰다. 따뜻한 욕조 안에 몇 시간이고 늘어져 있자. 오늘 밤은 아마 잠들지 못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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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4
Dolce ; 드림 평일 전력 @dream_DOLCE60
비가 오는 날엔
오늘은 조금 급하고, 오랜만에 써서 감이 잡히지 않아 플롯이라 생각하고 긍휼하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원래 쓰려던건 다른 내용이었지만 지인분이 말씀하신 썰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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